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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드라마

울지마 톤즈로 알려진 이태석 신부 다큐멘터리 영화

by 퍼니월드 2022. 12. 21.

 

안녕하세요

퍼니월드입니다

영화 '울지마 톤즈'의 주인공 아프리카 남수단 톤즈에서 본인이 아닌 타인을 위해서 희생과 헌신을 한 고 이태석 신부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이태석'을 소개합니다

줄거리

'울지마 톤즈'로 국내에도 많이 알려졌고 아프리카 남수단에서 모든 것을 헌신한 고 이태석 신부의 이야기를 다라갑니다. 고 이태석 신부가 사랑했던 남수단 톤즈... 그곳의 또 다른 이태석들, 이태석 신부가 만들었던 브라스밴드의 아이들은 지금 잘 지내고 있을까? 남수단 케냐, 한국에서 고 이태석 신부의 흔적을 찾아 갑니다. 고 이태석 신부가 있었던 8년 동안 이태석 신부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기억들을 찾아가고 마지막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영화소개

영화 '이태석'은 '울지마 톤즈' 이후 아프리카 남수단에 남겨진 고 이태석 신부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사랑과 헌ㅅ니에 대한 정신을 깨닫게 만드는 이태석 신부의 마지막 이야기를 그린 다큐멘터리 영화 '이태석'이 12월 29일 개봉을 확정했습니다. 영화 '이태석'은 인간미가 넘쳤던 모습과 공개되지 않았던 모습, 그리고 아직까지 그들을 기억하는 이들의 인터뷰를 담아서 또 다른 감동을 선사할 예정입니다.

 

고 이태석 신부는 아프리카 남수단 톤즈에서 8년동안 선교사 뿐만아니라 의사이자 선생님으로 활동했습니다.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정신과 희생이 알려지며 세상을 밝게 만든 사람들 33인에 선정되어 사회의 귀감이 되는 사람으로 주목받았습니다.

 

아프리카 남수단 작은 마을 톤즈에서 8년 동안 함께 생활하며 많은 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전해주었던 그의 영향력은 어떤 결과를 낳았을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톤즈의 사람들이 전하는 '이태석'은 그가 살아생전 전했던 선한 영향력과 그 결과들을 담은 다큐멘터리입니다

이태석 이야기

고 이태석 신부는 1962년 10월 17일에 부산에서 출생했습니다. 10남매 중 9번째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홀어머니가 삸바느질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열심히 공부하여 성적이 우수했고 성당에서 풍금을 독학으로 익히고 직접 작사, 작곡도 하는 등 비범했다고 합니다. 1981년 부산경남고등학교를 졸업했고 1987년 인제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장래가 보장되는 의사의 길을 버리고 천주교 사제가 되기로 합니다. 이후 육군 군의관으로 복무하면서 신부가 되고 싶은 꿈을 가졌다고 합니다. 전역 후 성 요한 보스코 신부가 설립한 대표적인 카톨릭 교육 수도회인 살레시오 수도회에 입회하였습니다.

 

다시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다시 공부하여 20001년 6월 24일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이 집전한 사제서품을 받았습니다. 남들보다 늦은 시작이었지만 신앙과 덕행은 남달랐습니다. 사제서품을 받은 직후 아프리카 케냐로 갔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더 위험한 지역인 20년 동안 내전이 계속되었던 수단(현재 남수닥 지역)으로 건나가 의료활동을 하였습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병원을 만들고 나병으로 불리는 한센병 환자들과 결핵 환자들을 보살피며 지속적인 예방접종 사업을 벌였습니다. 또한 일주일에 한번씩 오지 마을을 돌며 이동진료를 하며 봉사하였습니다. 지속된 내전으로 인해 가장 피해를 받을 미래 세대들을 위하여 손수 학교와 기숙사를 짓고 수학을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학생들을 모아 악단을 만들고 지휘를 맡게 됩니다. 이때 브라스밴드 악기를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이 한명도 없어서 직접 교본을 보고 배우면서 아이들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2008년 10월 휴가차 귀국하여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대장암 4기라는 충격적인 결과를 받았습니다. 말기 암 선고를 받고도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남수단으로 돌아가겠다는 의지가 워낙 강해서 주변 사람들이 겨우 말렸다고 합니다. 담당 의사의 말에 따르면 말기암 선고를 받자마자 톤즈에서 마무리하지 못한 우물에 대한 걱정을 했다고 합니다. 본인이 암 판정을 받아서 그런게 아니라 앞으로 봉사활동을 계속하지 못할 것에 대한 걱정으로 보였다고 합니다. 

 

투병 중에도 자선 공연도 하고 각 지역의 성당을 직접 찾아가서 봉사활동과 지원을 호소하였지만 결국 암이 간으로 전이되어 2010년 1월 14일 새벽 5시 35분 "Everything is good." 이라는 유언을 남기고 47세를 일기로 선종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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